Ⅰ. 화 랑 도
1. 화랑도의 연원
화랑도가 언제부터 신라에 있어서 국가 사회 중흥의 대도(大道)로 체계화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문헌의 불비(不備)로 인해 분명한 추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선 화랑도의 설치에 대한 직접적인 기사를 찾아보면 「삼국사기」에서 진흥왕 37년(576) 초 봄에 처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 양국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귀족들을 장악하게 되고 급기야 는 실제적인 권력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1192년 가마쿠라에 막부가 만들어지면서 무사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화랑화랑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원화에서 기원한다. 원화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일편의 제도였다. 이는 여러 사람을 떼 지어 놀게
귀족제도의 사회였다. 그들은 왕실과 親姻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관력을 독점하고 대토지를 겸병하여 그 정점에 서 있었다. 이들 문신귀족정권은 점차적으로 중앙귀족, 왕도중심으로 굳어져 타의 정치참여를 거부하는 독선을 자행했고, 이로 인해 기층사회와의 괴리.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 사
귀족국가의 확립에 중요한 논리로 작용했다. 그래서 충효사상을 관리들에게 확산시키고 그를 바탕으로 국가를 경영하고자 했다.
2. 태학 [太學]
372년 고구려에서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귀족의 자제를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의 제도를 본떠 국립학교로서 중앙
국가수호에 힘쓸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화랑제도가 국가적 차원에서 마련된 것은 이러한 목적에서였다고 하겠다.
한편 신라에서 행하여진 인재등용의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화랑도 교육이고, 둘째는 弓箭으로 인재를 택하였다는 궁전법인데, 이는 언제 어떠한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화랑제도요 화랑의 윤리이며 화랑운동이었다. 화랑다운 인물의 양성에 힘쓴 것은 그 건국 초부터라고 보여 진다.
따라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랑은 곧 신라의 화랑이니 화랑은 본말 상고 선도제단의 무사 곧 그때의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衣를 입어 조의
신라문화의 극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정치
중대 신라의 시대구분은 《삼국사기》에서는 서기전 57년(혁거세 거서간 1)~654년(진덕여왕 8)까지를 상대(연맹왕국 완성과 귀족국가 태동 귀족세력 연합기) 654년(태종무열왕 1)~780년(혜공왕 16) 를 중대 (전제왕권기) 780년(
강화
*유형원의 균전론- 자영농 육성 (사?농?공?상에 따라 차등 분배)
*이익의 한전론- 영업전 설정, 토지 소유 평등화
*정약용의 여전제- 공동농장제도: 토지 공동소유와 공동경작
정전제- 국가가 토지 사들여 농민에게 나누어 주고, 자영농 육성, 병작 농민이 지주의 땅을 소작하게 하는 제도